중도장애인의 장애수용 과정 <펭귄 블룸>
영화감독 류미례
비대면 문화가 일상화되면서 온 국민이 사랑하는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의 촬영이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사상 초유의 재택 환경 속에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직접 극장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아도 안방에서 쉽게 구해보실 수가 있으니까요.
이번 호에 준비한 영화는 넷플릭스에서 만날 수 있는 <펭귄 블룸>입니다. 갑작스런 사고를 당한 한 여성이 가족들의 사랑으로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이 담겨있는 아주 따뜻한 영화입니다. 제목만을 들었을 때에는 블룸이라는 이름의 펭귄이 주인공인 영화일 것 같지요? 그런데 이 영화에는 펭귄이 아닌 까치가 등장합니다. 펭귄 없는 펭귄 영화라는 것이 이 영화의 반전이죠. 까치의 이름은 펭귄 블룸, 그러니까 블룸가족의 일원인 까치가 있는데 그 이름이 펭귄인 겁니다.
블룸가의 구성원은 부부와 아들 삼형제인데요 늘 활기차고 행복하던 어느 날 엄마 샘이 사고를 당해 등허리 아래쪽으로 마비가 되어 모든 것이 변해 버립니다. 특히 첫째 아들 노아는 자기 때문에 엄마가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책감이 아주 큽니다. 어느 날 노아는 해변에서 새 한 마리를 발견하는데요 둥지에서 떨어져서 죽을 위험에 처한 까치를 구한 노아는 집으로 데려와서 키우게 됩니다. 약한 펭귄이 점점 건강해지며 날개를 펼쳐 날아가는 과정과 함께 엄마 샘이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잔잔하게 펼쳐집니다.
이 영화는 장애에 대해서 굉장히 진지하고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산산이 조각난 것처럼 보였던 한 여자의 삶이 가족의 사랑 속에서 환해지고 역시나 상처를 회복해가는 한 마리 새를 통해서 관객들 또한 치유의 경험을 선물 받을 수 있습니다. 나오미 왓츠, 앤드류 링컨, 재키 위버 등 배우들의 연기도 아름답지만 블룸가가 위치해있는 마을의 풍광도 아주 아름다워서 코로나에 지친 관객들도 치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서핑을 할 만큼 활동적인 샘이 사고를 당하는 순간은 어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온 가족이 행복한 태국여행, 노아는 저기에 올라가면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엄마를 부릅니다. 한 발 한 발 계단을 올라가고 멋있다는 탄성이 나오는 것도 잠시, 엄마가 기댄 난간이 무너지면서 엄마는 추락하고 맙니다. 노아가 찍은 홈비디오에 그 장면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비명과 함께 저 아래 쓰러져있는 엄마의 몸까지도요.
블룸가의 생기발랄한 일상이 여행지에서의 사고로 산산조각나는 순간은 프롤로그에서 속도감있게 표현됩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면 쓸쓸한 풍경들이 느리게 펼쳐집니다. 분주한 아침, 가족들이 모두 나가고 나면 샘은 혼자 쓸쓸히 하루를 보냅니다. 그리고 다시 가족들이 돌아오면 또 풍경은 분주해집니다. 세 아이 모두 손이 많이 가는 초등학생들인데 남편 카메론 혼자 삼형제와 샘을 돌보느라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니 제가 다 숨이 차더군요. 아이들은 모든 도움을 아빠에게 요청하고 샘은 침대에 누워서 그 모든 소리들을 듣고만 있어야 합니다. 서핑을 즐길만큼 활동적이었던 샘의 무기력이 느껴지시지요?
중도장애를 갖게 되었을 때 가장 힘든 건 당사자겠지만 가족들의 어려움 또한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영화는 모두의 마음과 노력을 섬세하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샘만큼 힘든 사람이 첫째 노아입니다. 노아는 엄마의 사고가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합니다. 작은 카메라를 들고 자기만의 영화를 만들고 있는 노아의 말들이 영화의 나레이션이 됩니다.
“태국에는 매년 2천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간다. 4천만개의 손이 그 난간을 붙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 엄마여야 했을까. 차라리 나였어야 하지 않을까?”
이 심성 고운 아이는 다친 새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지요. 둥지에서 떨어진 까치 새끼가 버둥거리고 있을 때 까치를 노리는 도마뱀을 보고 용기를 내서 쫓아버립니다. 그리고 집으로 데려오지요. 우울의 늪에 빠진 샘은 까치 펭귄을 반기지 않습니다. 펭귄을 대면한 샘이 얼굴을 찡그리는 이유가 단지 귀찮음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샘도, 그리고 관객도 펭귄과 샘을 같이 생각하게 되는 시작점이지요. 가라앉은 채 우울한 샘과는 달리 펭귄은 불편한 몸으로도 온갖 데를 다 다닙니다. 샘의 고요는 그렇게 깨어집니다. 다행스럽게도 고요와 함께 무기력과 우울도 깨져갑니다. 아마도 CG로 표현되었을 장면이겠지만 까치 펭귄이 사고치는 장면들이 참 재미있고 신기합니다. 펭귄이 그렇게 난리를 쳐놓고 나면 샘은 휠체어를 끌고 다니면서 그것을 수습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샘 또한 펭귄에게 마음을 엽니다. 어리고 상처입었던 까치는 블룸 가족의 보살핌 속에서 치유되고 성장해서 * 상단: 실화 주인공 하단: 영화 주인공
떠나갑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블룸가족에게 큰 힘이 됩니다. 날지 못하던 새가 날게 되는 동안, 샘 또한 자기만의 방식으로 인생을 걸어갑니다. 1월에 공개되었으니 비교적 최신작인 이 영화가 오롯이 장애에 대해서 다루고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있어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며 자신의 현재를 사랑하게 된 샘이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소풍을 갑니다. 수평선이 보이는 높은 언덕 같은 곳에 도착하자 가족들은 잠시 샘을 내려놓고 자리를 폅니다. 뒤쪽에서 가족들이 함께 즐길 것들을 준비하는 동안 앉아 있는 샘이 뭔가를 봅니다. 샘이 눈길 저 편 절벽 끝에는 사고가 나기 전의 샘이 서있습니다. 그리고 옛날 모습의 샘은 웃으면서 손을 흔들며 현재의 샘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이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몇 년 전에 들었던 한 장애여성의 이야기 때문이었어요. 그 분의 사고도 한 순간이었는데요 버스가 크게 흔들려서 넘어졌는데 그 때 이후로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대요. 처음 몇 년 동안은 꿈 속에서는 걸어다녔대요.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휠체어를 탄 자기가 등장하더래요. 그 여성처럼 샘 또한 변화된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죠. 늘 두 다리로 서있거나 걷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지내다가 혼자서는 이불도 덮기 힘든 처지가 되어버린 샘은 한동안 결코 돌아갈 수 없는데도 현재의 몸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펭귄을 만나고, 노아의 고백을 듣고, 카약을 시작하면서 현재의 자기를 받아들이자 늘 돌아가고 싶어했던 ‘걷는 나’는 그렇게 웃으면서 작별을 고합니다. 장애수용의 순간을 이렇게나 아름답게 표현한 영화가 또 있을까요.
영화는 펭귄의 성장과 샘의 변화를 나란히 보여줍니다. 약한 펭귄이 점점 건강해지며 날개를 펼쳐 날아가는 과정과, 삶을 부정하고 좌절감만 가득했던 샘이 카약을 배우고 새롭게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기차의 평행선처럼 나란히 가며 관객들의 마음에 스며듭니다.
더 이상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순간 좌절하고 절망하게 되지만 결국 수용하게 되는 시간, 변화된 나를 받아들이고 결국 나의 삶을 사랑하게 되는 시간, 그 시간들을 함께 느껴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