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격려하는 첫 걸음
류형석 감독의 <코리도라스>
류미례 감독
올해 가을에도 어김없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열렸습니다. 다큐멘터리는 늘 최전선의 이슈들을 다루는데 DMZ다큐멘터리영화제는 전 세계 최신작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최전선 중에서도 최전선의 이슈들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39개국에서 온 126여편의 상영작들의 세계 곳곳의 이슈들을 담으며 세상 구경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상영작 중 한 편인 류형석 감독의 <코리도라스>를 준비했습니다. <코리도라스>는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하고 있는 박동수 씨를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제목 <코리도라스>는 물고기 이름입니다. 제가 따로 조사한 게 아니라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코리도라스는 메기과의 열대어로 바닥에서 생활하면서 다른 물고기들이 먹고 남은 사료들을 먹어서 청소용 물고기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하얀 몸에 까만 눈을 가진 코리도라스는 좀 뚱한 표정이라 귀엽기도 합니다.
영화의 첫 컷은 까맣습니다. 검은 무지화면이라고 생각한 순간, 문이 열리고 환한 빛이 쏟아집니다. 그 문 밖으로 나가서 아파트 복도와 경사로와 횡단보도와 큰 도로를 쌩쌩 달려 도착한 곳은 자연수족관입니다. 주인공 박동수 씨가 그 곳에서 코리도라스를 사는 것이 영화의 첫 장면입니다. 까만 화면에서 문이 열릴 때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문턱입니다. 아파트 복도와 경사로와 횡단보도와…… 그 모든 길을 현관 문턱 만큼의 높이에서 바라봅니다. 그래서 화면에서 보이는 건 주로 바닥입니다. 중간중간 도로의 볼록렌즈에 비탈길을 휙 지나가는 휠체어가 보이기도 하고 휠체어를 탄 사람의 뒷모습이 근접해서 보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보다 물고기들이 먼저 나오고 주인공 박동수씨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은 3분이 지난 후입니다. 정말 인상적인 프롤로그였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니 주인공 박동수 씨가 아는 분이더군요. 2010년 원해수 감독이 만든 <동수이야기>에서는 시설을 나와 자립생활 체험홈에서 생활하던 박동수 씨가 등장합니다. 귀에 피어싱을 하고 헤어젤로 멋을 내던 그 때로부터 10여 년이 지나고 다시 만나니 정말 반가웠습니다. <동수이야기>에서는 활동지원사 광길씨와의 평등한 관계가 인상적이었는데 <코리도라스>에 등장하는 활동지원사 김진산 씨와의 관계도 참 편안해 보였습니다. 장애인 당사자와 활동지원사와의 바람직한 관계설정은 여전히 논쟁 중인데 그래서 박동수 씨가 나오는 영화들은 생각거리를 던져줄 것같습니다.
오랜만에 영화로 만난 동수 씨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줍니다. 동수씨는 시인이었더군요. 그런데 시가 잘 안 써진대요.
“시설에 있을 때는 희망도 없고 앞이 깜깜한 지옥 같은 이런 곳에서 살면 내가 죽겠더라고. 그래서 내 시로 내가 다른 세상을 만든 것같아. 그 나라에는 미움도 없고 고통도 없고 아름다움만 가득했어. 근데 시설에서 나오고 나서는 가끔씩만 시를 쓰게 되더라. 도망갈 데가 많으니까.”
동수 씨는 ‘도망갈 데’라고 표현했지만 시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 동수 씨는 그리움이라든지 추억, 또는 아름다움 같은 것들을 찾아나섭니다. 그래서 자신이 써 온 시의 흔적을 찾기 위해 부산의 시설을 찾거나 아름다운 존재를 옆에 두고 싶어서 코리도라스를 사옵니다.
물새가 날고 안개가 자욱한 호수에 동수 씨가 몸을 담그는 장면이 있습니다. 꿈처럼 환상처럼 보여지는 그 장면은 동수 씨의 시와 연결되면서 그 의미가 확장됩니다.
‘…은빛이 가득한 호수/ 그 곳에서 잠시 쉬어봅니다/ 지치고 또 지친/ 내 영혼’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박동수 씨는 어느 시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이 자기들 즐겁자고 만든 종이배를 무책임하게 호수에 떠내려보내는 것이 보기 싫다고 말했다’라는 자막이 나옵니다. 그리고 시각장애가 있는 종교인과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예수님 말이 저 분(장애인)의 잘못도 아니고 다 하나님을 위해서 장애인을 만들었다고. 나는 그 말이 기분 나빠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너무 고통스럽게 만들었잖아요. 그건 너무 이기적인 것같아요. ”
호수의 물에 몸을 담근 동수 씨의 모습은 영혼의 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수 씨가 함성을 지를 때엔 ‘이기적인 하나님’에 대한 항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그렇게 풍부한 영감을 주며 마음 속 얇은 막들을 떨리게 합니다.
장애라는 키워드 때문에 골랐는데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영화는 사려 깊고 아름답고 새롭습니다. 소위 ‘사회적 약자’라 불리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을 때 다큐멘터리감독들은 쉬지 않고 기원합니다. 내가 저 사람을 내 영화의 재료로만 소비하지 않기를, 이야기의 주인 자리를 독점하지 않기를, 내 주인공의 진실을 왜곡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촬영하고 편집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류형석 감독과 박동수 씨를 함께 만나 영화 뒷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 놀라운 영화는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동수 씨는 영화 속 자기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영화의 잔상은 오래 남아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문득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루미나리에 아래에서 휠체어를 타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동수 씨의 모습은 춤을 추는 것같았어요. 잔설이 남은 잔디밭에서 발가락으로 조정기를 움직이며 RC카를 모는 동수 씨의 신나는 표정에서는 자유가 보였습니다.
저는 지금 평생 몸담고 있었던 시설을 떠나 자립생활을 꿈꾸는 한 장여애성의 체험홈 한 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 첫 회의만 다녀온 상태인데 기대가 큽니다. 지역 사회의 여러 단체에서 그 분의 한 달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같이 고민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든든했습니다. 한 달 동안 하고 싶은 일 목록 중에 ‘염색하기’와 ‘서울 야경보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두려움과 망설임 속에서도 자유를 찾아서 시설 밖으로 나온 분들의 첫 걸음 덕분에 뒤에 오시는 분들의 불안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같습니다. <코리도라스>는 그런 의미에서 최전선 중에 최전선에 서있는 영화입니다. 이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주신 류형석 감독님께 감사 드리며 기회가 되면 꼭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문의: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1899-8318)